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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어느 아프가니스탄 참전 용사의 회고.

by 경계인 A 2017. 4. 11.

2010년에 저는 정찰소대 소대장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워닥주에 파병되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죠. 바다와 같이 사방으로 펼쳐진 산, 하늘은 구름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고, 밤은 칠흑과 같아, 별들의 담요를 두르고 있는 것만 같았죠.

 

하지만 저는 점령군이었습니다. 제 가족은 베트남전을 피해 도망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가족을 고향에서 떠나게 만든 전쟁과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는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죠. 비현실적인 목표, 지역 문화 이해의 실패. 마치 제가 폭군 같이 느껴지더군요.

 

어느 날 아침엔가에 저희는 전과 확인을 위해 호출되었습니다. 거기서 저희는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식은 몸을 둘러싼 채 울부짖고 통곡하고 있는 학교 선생님의 시체를 맞닥뜨렸습니다. 밭을 돌보던 중 오인 사격을 받았더군요. 저나 제 소대원들이 방아쇠를 당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저의 가슴 속에는 그때 느낀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남아있습니다. 제 할아버지께서는 베트남에 계실 적 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그 남자의 죽은 얼굴을 들여다 보았을 때, 저는 제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프가니스탄의 고통과 비극을 제 자신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우리 가족이 도망쳐야 했던 전쟁과 같은 전쟁 속으로 미군 보병 소대를 이끄는 제가 제 뿌리와 가족을 배신한 것처럼 느껴졌죠.

 

미국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뭔가 붕 뜬 기분이었죠. 제 안의 어딘가는 미국에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미국에는 저를 잡아둘 친구도, 직장도, 집도 남아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뉴욕의 어느 난민 NGO에서 일할 기회를 보았을 때, 저는 전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고 거기에 지원했습니다.

 

NGO의 유급 직원들은 연방 지원금이 쥐꼬리로 줄어들며 난민들을 위한 침대와, 아파트와, 그들이 일할 저소득 일자리를 구하려고 미친 듯 노력했죠. 곧 저는 막 경력을 쌓아올릴 준비를 해나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사이에서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NGO는 저희에게 망명 요청자들이나 난민들의 필요를 제공해주는 일을 위탁했습니다. 무급 직원들은 방금 미국에 도착한 난민을 데리고 온갖 사회 복지 서비스 앞에 놓인 관료주의적 미로를 그들과 헤쳐나가는 일을 맡았습니다.

 

저는 첫 손님몇을 그들이 푸드 스탬프에 지원하는 날, 데리고 맥도날드에 갔죠. 튀김 음식의 바다에 익숙하지 않은 다른 손님들은 제가 주문한 것과 같은 것을 주문했는데, 어느 한 손님은 빅맥을 주문하더군요. 그들과 앉아 수 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 기다리고, 서류를 정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하루 일정을 설명하는데, 그가 빅맥을 입안 가득 한입 크게 베어 물고 말하더군요. “져눈 미쿡이 조와요.”

 

요즈음 백악관에서부터 피어 오르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을 보고 있자면 그가 그의 말을 후회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다른 많은 손님들처럼, 그는 그가 박해 받던 나라를 떠나 또 다른 박해가 가해지는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어느 한 여성은 저에게 말해주길, 그녀는 철제 침대 골조에 묶인 채로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종교적 믿음을 이유로 고문 받았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국경까지 안전을 찾아 걸어간 뒤, UN이 그녀의 재정착 전 신원 조회를 위해 긴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거기에 발이 묶여있었죠. UN의 조사가 끝난 뒤에도, 그녀는 미국에 들어오기 위해 국토안보부 하에서 또 다시 집중적인 신원 조회 과정을 거쳐야 했죠. 물론 신원 조회는, 극비취급인가를 가지고 있는 저보다 훨씬 고되고 진빠지는 절차였습니다.

 

어떤 날들은 저는 프론트 데스크에서 전화를 받으며 보냈죠. 그런 날이면 시리아에서 전화가 오곤 했습니다. 저에게 제발 시리아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달라고 빌었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프간인들과 이라크인들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미국의 전쟁 수행을 도운 이들이었죠. 그들은 폭행 당하고, 살해 협박을 받고, 마을에서 따돌림 당하고, 사력을 다해 미국으로 왔죠. 그리고 그들은 여기서 적대적으로 변한, 그들이 도왔던 나라와 마주했습니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이 아직 시민권을 얻지도 못한 미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어떤 남자는 아프가니스탄에 돌아가 사람들을 돕겠다며 육군에 입대하더군요.

 

난민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엷어졌습니다. 너무나도 낯선 그 가족들이,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죠. 저는 종종 그들에게 제 부모님도 당신들과 같은 난민이었음을 고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서러움이 이해 받았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영혼에 자그마한 위안을 얻더군요.

 

저는 일을 하며 딱 한 번 울었습니다. 아주 예쁜 딸아이 둘을 가진 아프간 가족이었죠. 하나는 새로운 환경에 신이 난 막 학교에 들어갈 나이 즈음의 아이였죠. 다른 하나는 백혈병에 걸린 유아였습니다. 폭약이 내뿜은 유독물질이 오염시킨 아프간과 이라크에서는 흔한 질병이었죠. 저는 조용하고 어두운 구석을 찾아, 숨죽이고 울었습니다.

 

감정적 소모가 이따금은 너무 심했죠. 난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보다 인간성을 말살한채로 그들을 대하는 일이 훨씬 쉬웠습니다. 전우들에게서도 보았던 일이었죠. 저의, 우리들의 가슴에는 그 거대한 고통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만큼의 공간이 없었습니다. 제 직장 동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그저 너무 지쳐있었죠. 제 NGO의 직원들은 긴 시간을 일하고, 사비를 털었고, 그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아파트가 난민들이 살던 고향집과 같아 보이지 않도록 노력을 했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긴긴 여정에서 잠시 도달하는 지점일 뿐이었죠.

 

어느 날 저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한 서아프리카에서 방금 도착한 손님을 응대하게 되었죠.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가 이름을 말하더군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을 말하더군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제, 자매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하나 하나 모두 이름을 대더군요, 대가족이었습니다.

 

모두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훈련 받은 대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죠, 저는 그가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도록 여기에 있다고 했죠. 그가 필요하다면, 정신과 전문의를 소개해줄 수 있도록 조금만 참고 기다려달라고 했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입을 닫고 잠시 기다렸다가, 서류를 완성할 수 있도록 그에게 휴대전화번호를 다시 물어봤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서류를 작성했고, 점심시간을 갖고, 그 뒤에는 더 많은 손님들을 받았죠. 하루가 끝났습니다. NGO에서 보낸 나머지의 시간 속에서 저는 분노, 슬픔 혹은 공허함만을 느낄 수 있었죠. 이런 상태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제가 응대하는 이들에게 공평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1년 동안 그 배고프고, 집 없고, 평지풍파에 시달린 사람들을 돌봐주다가, 저는 NGO를 떠났습니다.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안락한 직장과 넉넉한 월급에 죄책감을 느낄 때면, 가끔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기도 합니다. 가끔은 NGO를 나온 제 자신을 증오하며 보내는 날도 있죠. 왜냐면 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왔건,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을 보상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죠.

 

대통령이 무슬림들들과 난민의 입국 금지 명령을 서명했을 때, 미국은 저에게 외국이 되었습니다. 난민의 자식으로써, 저는 제 가족을 고향에서 쫓아낸 것과 같은 전쟁에서 도망쳐오는 이들을 위해 새 집을 찾았죠. 군인으로서, 저는 전쟁 속에서 저의 집을 찾으려 손을 뻗었죠. 저 언덕 위 높은 성의 사나이 주변으로 국경이 닫힌 지금,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집이 멀게 느껴집니다.

 

10산악사단 4여단 89기병연대 예비역 대위, Drew Pham



1http://foreignpolicy.com/2017/04/10/i-was-an-army-officer-but-nowadays-america-feels-like-a-foreign-country-to-me/?utm_content=bufferf7596&utm_medium=social&utm_source=facebook.com&utm_campaign=bu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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