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떤이의 삶16

2359 18.09.22 하루하루 버텨냄에 바빠 사색을 할 여유도, 시간도 없이 점점 무뎌져 간다. 그렇게, 크림빛으로 바래간다. 2018. 9. 22.
1854 02.07.18 사람은 항상 합리적으로 살아야하는가. 경주마처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잠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1년만' 투자 하는 것이 그토록 반대를 받을 일인가. 통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부모란 그렇게나 중요한 존재이기에, 인정을 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그토록 실망시키는 일인가. '멋있어서'라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를 잠시 옆에 놓아두고 1년만 투자하고 다시 궤도로 돌아올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인가. 나는 기대를 저버린, 실망스러운 자식인가. 2018. 7. 2.
2259 02.05.18 (01.01.16) 만성적인 외로움,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모든 일이 끝난 지금에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 속의 이 감각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하는 짐인가. 내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 이전이 끊임 없는 답 할 수 없는 질문들의 연속들과 슬픔들의 압도적인 힘에 깔려 죽어가면서도, 아등바등 힘을 써보겠다고, 내 스스로 답을 내어보겠다고 발버둥치며 느껴지던 고통이라면- 지금은 무엇이라고 할까, 고통이나 그 압도적임에 경도된 마비의 감각보다는, 길을 잃은 것만 같은 감각일까. 모든 것이 끝났을때 느낀 고양감은 찰나와도 같이 지나가고 상처의 자리는 까닭모를 마일드한 우울감과 탈력감이 자리를 메꿨다. 문제가 끝났다고 해서 그 경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이것은 감정의 관성이라고 믿고 싶다. 아니라면 나는 그 밑바닥.. 2018. 5. 2.
2341 25.04.18 인간의 성정이 형성되는 시기는 소년기와 10대의 유년기 아닐까. 시련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남들처럼 시련과 당면, 극복이라는 엔딩으로 끝났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더 행복했을까. 나도 그 시련을 이겨내었다. 아니, 견뎌내어 살아남았다. 자아는 뒤틀렸다. 그런 것 치고는 손목에 상처 하나 없이 오늘을 걷고 있으니 내 자신의 회복탄력성에 경의를 표해야할까. 근본적인 심리적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는데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고 삶은 살아가야 하니까 고기능자로써의 유쾌한, 외교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런 이 상태가 나의 nomalcy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 저변 의식에 깔린 문제에선 눈을 돌려버린채로. '유쾌한' 모습의 나에서 유쾌한 기분 비스므리한 것을 잠깐이나마 느끼기는 한다. 그렇다면 그런 감각 수용체.. 2018. 4. 25.
1236 07.04.18 외롭고 공허한데 누군가 너무 지나치게 가까이 들어오는 것은 무섭다. 상처가 나 있는데 어떻게해야 아무는지는 모르겠다. 지치고 피로한데 무엇인지도 모를 무언가가 구원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감정은 고갈되어 돌려줄 수 없는데 누군가 나아게 감정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파란 빛으로 마음이 비어 슬픈 소리가 망연히 울리는데 그 까닭을 모르겠다. 길 잃은 나는. 2018. 4. 7.
10.06.17-12.06.17; 슬로베니아에서의 단상 이따금 어느 이름 모를 연못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있다. 산 속 깊은 한 구석에 숨겨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실개천 만이 유일하게 조그맣게 졸졸 흘러 들어오고 있는, 섬뜩하리 만치 조용한 어느 이름 모를 연못 말이다. 무채빛 연못 가득 가라앉은 침전물은 어디론가 흘러가는 일 없이 그 안에서 그저 썩고 또 썩어갈 뿐이다. 고여가는 연못은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조용히 천천히 그렇게 썩어 죽어갈뿐이다. 그런 연못과 내 자신의 모습이 기묘하게도 자꾸 겹쳐 보이는 이유는 어째서 일까. 졸업을 앞둔 대학 생활의 끝자락, 만 21세의 나는 서서히 침전하여 썩어가고 있다. 가슴 안에 꽉찬 응어리들은 사라지는 일 없이 가슴 한 자락을 계속 쿡쿡 찌르고 있다. 연청빛 멜랑콜리함과 암청빛 슬픔은 가슴에서 기어나와.. 2017.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