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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공방/소설5

[단편] 검자줏빛 튤립 * * * 여자의 몸으로 군에 몸을 담게 되기까지 배경에 별로 대단한 사연이 있지는 않았다. 가정 단위의 평범한 비극은 세상천지 길가에 치이는 돌만큼이나 흔한 것 아닌가? 구태여 내 개인적 인생 역정에 대해 구구절절 넋두리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으리라 믿는다. 나의 비극이라는 것은 딱 남들만큼의 평범한 비극이었다. 내 자신을 특출나게 불쌍하다 여긴 적도, 그런 시선을 달갑게 여겨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물어보는데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말을 얼버무리는 것은 어딘가 좀 떳떳하지 못해보이는 것 같아 나는 누가 가정환경에 대해 물어오면 간략하게나마 솔직히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면 대부분 화들짝 데인 듯 어색하게 말을 돌렸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솔직히 이야기하는 편이 .. 2018. 11. 6.
[단편] 흥남 그 이후: 전직 스파이의 회고 * * * 당신네들이 '흥남 참사'라고 부르는 그거 말이죠, 우리네는 어떻게 부르는 줄 알아요? '흥남 상륙작전'이라고 불러요. 어쨌거나 그 지옥에 상륙한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깃발을 꽂았다 이거에요. 작전 목표는 달성했으니까 영웅적 희생을 통해 달성한 영광스런 승리 아니겠어요? 제가 왜 이 얘기를 하냐면, 당신네 미국인들하고 우리는 같은 민주사회여도 죽음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 이거에요. 당신네들이 '국화와 칼' 읽으면서 옛날에 일본 놈들 이해해보려 한 거 같이 동양과 서양의 정신문명 차이 때문이랄 수도 있고, 아니면 2차한국전에 얽힌 심정적 이해관계 수준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이유야 뭐 갖다 붙이려면 얼마든 많겠지만 어쨌거나 핵심은 뭐냐면 거 옛날에 걸프전 직전에 후세인이 인터뷰에서 한 .. 2018. 6. 8.
[장편] 랑림군의 레토르트 영웅들 : 1564고지 ( 03 ) ‘좆같은 얘기나 주절거리는 기자양반이 어인일로 여기까지 행차하셨는지?’를 ‘아 기자님 성함이 다시 어떻게 되신다고요? 아, 이우현 기자님. 이야, J일보! 민족 정론지 아닙니까 정론지! 우리 기자님 배우신 분이시네. 아유, 뭐 힘들게 짐을 이렇게 많이 들고 오셨어요. 어서 짐들 애들한테 넘겨주세요.’ 로 돌려 놓는데 필요한 것은 담배와 성인 잡지, 술, 그리고 고기였다. 본디 군인들이란 슬프리만치 만성적으로 욕구에 배고픈 존재들인 법이다. 술과 고기가 있다는 이야기가 돌자 몇 시간 뒷면 마침 저녁 시간이기도 하여, 기세를 타고 아예 바로 석식으로 고기 판을 까는 분위기가 되었다. “호준아.” “일병 권호준.” “소대장님한테 가서 여쭙고 와라.” “예.” 권호준이라고 불린 까까머리 청년 하나가 곧바로 후다.. 2017. 8. 2.
[장편] 랑림군의 레토르트 영웅들 : 1564고지 ( 01~02 )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진녹빛의 수해(樹海)가 차창 가득 넘실거린다. 좌석에 몸을 거의 동여 메다시피 안전벨트를 조여 놓고, 좌석 위 손잡이를 손아귀가 새하얘지도록 붙들고 있는 노릇이었지만, 헬기가 휙휙 기수를 갑자기 틀 때마다 사타구니에 힘이 절로 들어가고 식은땀이 줄줄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쾌한 기타 전주. 귓전에 노랫가사가 스친다. ‘...And when the band plays Hail to the chief, Ooh, they point the cannon at you, Lord.’ 꽉 깨문 오른쪽 어금니가 잇몸을 짓누르며 아릿한 통증을 전해온다. 그 와중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은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조금이라도 공포를 줄여보려고 귀에 꽂아 놓은 이어폰인데, 공.. 2017. 4. 26.
[단편] 켈로이드(흉터종) 환상통 * * * 비가 내린다. 밤이 살풋 내려앉은 도시 위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에 어깨춤이 젖는다. 어느샌가 암흑빛 캔버스 위로 주황빛, 흰빛의 빛조각들이 비의 흔적 위로 색색이 내려앉는다. 이따금 지나가는 차가 캔버스를 즈려밟을 때면 그 바람에 일렁이는 캔버스 위 빛의 조각들이 하늘하늘 왈츠를 춘다. 가만히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적막감만이 감도는 버스정류장에는 찬 밤공기마저 가만히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이슬비 방울방울이 아스팔트 위로 톡톡 내려앉는 소리마저 들려오는 듯한 암전과 같은 적막. 그 깨끗한 적막에 감각이 예민해져온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왼쪽 다리가 쿡쿡 쑤시곤 한다. 주물러봐야 그때뿐인 진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류장 좌석에 앉아 가만히 다리를 주무르고 있자면 은은히 욱신거리는.. 2017.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