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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이의 삶

2341 25.04.18

by 경계인 A 2018. 4. 25.

인간의 성정이 형성되는 시기는 소년기와 10대의 유년기 아닐까.


시련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남들처럼 시련과 당면, 극복이라는 엔딩으로 끝났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더 행복했을까.


나도 그 시련을 이겨내었다. 아니, 견뎌내어 살아남았다. 자아는 뒤틀렸다. 그런 것 치고는 손목에 상처 하나 없이 오늘을 걷고 있으니 내 자신의 회복탄력성에 경의를 표해야할까.


근본적인 심리적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는데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고 삶은 살아가야 하니까 고기능자로써의 유쾌한, 외교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런 이 상태가 나의 nomalcy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 저변 의식에 깔린 문제에선 눈을 돌려버린채로.


'유쾌한' 모습의 나에서 유쾌한 기분 비스므리한 것을 잠깐이나마 느끼기는 한다. 그렇다면 그런 감각 수용체 자체가 맛이 간 것은 아닐터이다. 그런 내 자신의 모습 모두가 가짜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분이 '행복'이라는 스위치 전원의 전류로 작용하지 않는다. 피상적으로, 곧 손을 뻗으면 연기로 사라져버릴 무언가로 느껴진다.


내 머릿속 어딘가의 회로가 잘못 된 것일까.


가깝다고 정의하는 이들과의 시간 뒤에는 집에 가는 택시 차창 너머로 밖을 바라볼때 그리 공허하지 않다. '나쁘지 않다'에 가까운 기분의 여운이 잔잔히 감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이 구제불능으로 곪아버린 것은 아닐터이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니, 과거는 깨끗이 잊으라니. 내 자신이 과거의 결과물이고 그 과거의 상처가 해결되지 못한채로 살아 대책없이 밝고 긍정적이어본 때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흉내내기 이상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 뿌리 깊은 내 내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뒤틀리고 곪아 터진 내면의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채로 나아가는 미래라면 공허하고 얕다. 그런 공허한, 얕은 미래에 과연 의미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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