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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공방11

[장편] 랑림군의 레토르트 영웅들 : 1564고지 ( 01~02 )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진녹빛의 수해(樹海)가 차창 가득 넘실거린다. 좌석에 몸을 거의 동여 메다시피 안전벨트를 조여 놓고, 좌석 위 손잡이를 손아귀가 새하얘지도록 붙들고 있는 노릇이었지만, 헬기가 휙휙 기수를 갑자기 틀 때마다 사타구니에 힘이 절로 들어가고 식은땀이 줄줄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쾌한 기타 전주. 귓전에 노랫가사가 스친다. ‘...And when the band plays Hail to the chief, Ooh, they point the cannon at you, Lord.’ 꽉 깨문 오른쪽 어금니가 잇몸을 짓누르며 아릿한 통증을 전해온다. 그 와중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은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조금이라도 공포를 줄여보려고 귀에 꽂아 놓은 이어폰인데, 공.. 2017. 4. 26.
[단편] 켈로이드(흉터종) 환상통 * * * 비가 내린다. 밤이 살풋 내려앉은 도시 위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에 어깨춤이 젖는다. 어느샌가 암흑빛 캔버스 위로 주황빛, 흰빛의 빛조각들이 비의 흔적 위로 색색이 내려앉는다. 이따금 지나가는 차가 캔버스를 즈려밟을 때면 그 바람에 일렁이는 캔버스 위 빛의 조각들이 하늘하늘 왈츠를 춘다. 가만히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적막감만이 감도는 버스정류장에는 찬 밤공기마저 가만히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이슬비 방울방울이 아스팔트 위로 톡톡 내려앉는 소리마저 들려오는 듯한 암전과 같은 적막. 그 깨끗한 적막에 감각이 예민해져온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왼쪽 다리가 쿡쿡 쑤시곤 한다. 주물러봐야 그때뿐인 진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류장 좌석에 앉아 가만히 다리를 주무르고 있자면 은은히 욱신거리는.. 2017. 1. 10.
캔버스 그대가 있는 곳 나는 없고 나 있는 곳엔 그대가 있다 나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그대를 나와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 그대를 그리며 이따금 어두운 천장을 캔버스 삼아 가만히 그대를 그려본다. 2017. 1. 9.
상념 황금빛 시냇물 맑게 속삭이며 지나가고 숲 속 어디선가 불어오는 산들바람 스치며 작은 새의 지저귐 사뿐히 내려 놓고 가는데 너른 숲 속 나뭇가지 사이로 드리우는 부드러운 햇살 아래로는 오직 나 홀로만 앉아 있는 듯 하네요. 햇살과 바람 한데 모여 앉아 시간마저 잠시 멈춰 가는 순간에도 시냇물은 졸졸 분연히도 흐릅니다. 찰나의 순간 흘러 지나치는 시냇물처럼 마음 속 모든 것을 꺼내어 오롯이 한데 담아 시냇물에 살풋 띄워 보낼 수 있음 좋으련만 그럴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요. 2017. 1. 9.
잿빛 자화상 황량히 잿빛으로 바싹 마른 억새풀만 가득한 광야에서 꼿꼿이 나뭇잎 하나 없이 나뭇가지만 무성하게 드리운 채 외로이 말라 비틀어진 나무 한 그루와 마주쳤다. 그 이름 모를 나무를 지나쳐 걸어가려다가 까닭 없이 드는 서글픈 마음에 그 앞에 난 가만히 멈추어 선다. 그 이름 모를 나무가 처량해 보여 함께 앉으니 문득 나무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잘 보아달라 읊조리는 그대 속삭임에 유심히 다시 한 번 살펴보니 그대 그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 이런저런 상념을 말라 비틀어진 가지에 매단 모습이 언젠가 겨울 뒤 봄기운 내리면 나뭇잎을 피워 보이겠노라 그렇게 되리라, 비웃는 잿빛 세상에 외로이 외치는 그 모습이 그제야 나는 아, 너는 나무가 아니라 나로구나 싶었다. 2017.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