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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17-12.06.17; 슬로베니아에서의 단상 이따금 어느 이름 모를 연못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있다. 산 속 깊은 한 구석에 숨겨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실개천 만이 유일하게 조그맣게 졸졸 흘러 들어오고 있는, 섬뜩하리 만치 조용한 어느 이름 모를 연못 말이다. 무채빛 연못 가득 가라앉은 침전물은 어디론가 흘러가는 일 없이 그 안에서 그저 썩고 또 썩어갈 뿐이다. 고여가는 연못은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조용히 천천히 그렇게 썩어 죽어갈뿐이다. 그런 연못과 내 자신의 모습이 기묘하게도 자꾸 겹쳐 보이는 이유는 어째서 일까. 졸업을 앞둔 대학 생활의 끝자락, 만 21세의 나는 서서히 침전하여 썩어가고 있다. 가슴 안에 꽉찬 응어리들은 사라지는 일 없이 가슴 한 자락을 계속 쿡쿡 찌르고 있다. 연청빛 멜랑콜리함과 암청빛 슬픔은 가슴에서 기어나와.. 2017. 6. 15.
아드리아해로부터 바다 위에 두 발로 선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암청빛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 빛에 홀려 알아차리지도 못한채 조용히 다가온 먹먹한 슬픔에 살폿 쌓여 가라 앉아 버릴 것만 같은 때가 있다. 한숨 쉴 힘도 없이 가만히 고개를 떨구어 갑판 밖으로 내민 왼손 손가락 사이사이만을 바라보고 있자면, 손가락 틈새로 지나쳐가는 부서진 파도의 푸르고, 하얀 포말의 파노라마 위에 가만히, 그저 가만히 몸을 뉘이고만 싶다. 그래서 이름 모를 섬의 이름 모를 해변에 닿을 때까지, 그저 두둥실 떠내려가고만 싶다. 2017. 6. 10.
[장편] 랑림군의 레토르트 영웅들 : 1564고지 ( 01~02 )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진녹빛의 수해(樹海)가 차창 가득 넘실거린다. 좌석에 몸을 거의 동여 메다시피 안전벨트를 조여 놓고, 좌석 위 손잡이를 손아귀가 새하얘지도록 붙들고 있는 노릇이었지만, 헬기가 휙휙 기수를 갑자기 틀 때마다 사타구니에 힘이 절로 들어가고 식은땀이 줄줄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쾌한 기타 전주. 귓전에 노랫가사가 스친다. ‘...And when the band plays Hail to the chief, Ooh, they point the cannon at you, Lord.’ 꽉 깨문 오른쪽 어금니가 잇몸을 짓누르며 아릿한 통증을 전해온다. 그 와중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은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조금이라도 공포를 줄여보려고 귀에 꽂아 놓은 이어폰인데, 공.. 2017. 4. 26.
방문자 1천 돌파 기념. 소재나 키워드 몇 개, 혹은 테마 정해주시면 기한은 정확히 못드리겠으나 적당한 분량의 중단편 하나 씁니다. 2017. 4. 18.
0118 18.04.17 방문자 1천명! 기분은 좋네요. 2017. 4. 18.
어느 아프가니스탄 참전 용사의 회고. 2010년에 저는 정찰소대 소대장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워닥주에 파병되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죠. 바다와 같이 사방으로 펼쳐진 산, 하늘은 구름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고, 밤은 칠흑과 같아, 별들의 담요를 두르고 있는 것만 같았죠. 하지만 저는 점령군이었습니다. 제 가족은 베트남전을 피해 도망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가족을 고향에서 떠나게 만든 전쟁과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는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죠. 비현실적인 목표, 지역 문화 이해의 실패. 마치 제가 폭군 같이 느껴지더군요. 어느 날 아침엔가에 저희는 전과 확인을 위해 호출되었습니다. 거기서 저희는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식은 몸을 둘러싼 채 울부짖고 통곡하고 있는 학교 선생님의 시체를 맞닥뜨렸습니다. 밭을 돌보던 중 오인 사격을 받았더군요. 저나 제 소.. 2017. 4. 11.